2022
심상용(서울대학교 교수. 미술사학 박사)
이 이야기는 ‘미술관 만지기’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곳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홍보미에게 미술관은 결핍의 장소다. 그 결핍은 ‘만지기’의 부재에서 온다. 이 결핍을 이해하기 위해 작가는 2017년 미술관에 청소부로 취직하여 1년여간 그곳을 쓸고 닦는 시간을 보냈다. 누가 미술관을 잘 아는 사람인가? 그곳을 늘 만지는 것이 삶이자 노동인 청소미화원들이다. 이것이 이 이야기를 관류하는 담론이다. 그들에게 미술관은 미의 사원 정도가 구체성의 한계인 추상성의 영역이 아니다. 그 자체의 삶도 없고 태도도 역사도 없는 탈 장소가 아니다. 그들에게 미술관은 구체적인 삶의 연장이고, 공동체와 연대가 성취되는 장이며 노동의 현장이다. 바로 이 장소성의 포촉, 만지기가 홍보미의 드로잉 개념의 핵심이다.
홍보미의 드로잉은 세계에 대해 태도를 갖는 문제다. 태도를 갖기 위해서는 세계 안에 있어야지 그 밖에 있어서는 안 된다. 드로잉은 지필묵의 차원을 벗어나 신체적 개입의 차원에서 발생한다. 몸의 개입으로 드로잉은 관광객이 아니라 거주민의 일이 되고, 소비자로 범주화되기를 거부하고 생산자로 남는 길이 된다. 관광객에게 장소는 소비의 대상일 뿐 결코 장소가 아니다. 관광객은 태도를 가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갖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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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미는 5개월간 홍티아트센터 레지던시에 머물렀다. 의미 있는 사건이었나? 그렇다고 홍보미는 답할 것이다. “부산은 이런 작업을 하는 본인에게 언제나 매력적인 곳이었습니다. 특히 머무는 사람들과 떠나는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부산의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는 사람과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있어서 좋은 지역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홍보미가 부산비엔날레를 주목했던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부산은 거주에 대한 영감을 자극하는 장소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공항과 같은 리듬을 지니는 곳. 육지의 끝, 항구, 만남과 헤어짐, 홍보미는 알렝 드 보통의 , 『공항에서의 일주일』을 인용한다. 알랭에게도 런던 히드로 공항을 ‘만지는’ 일주일간의 기회가 주어졌다. 보통에 의하면 공항은 ‘파편 조각들’ 같은 탈장소다. 세계의 모든 시간이 제각각 돌아가는 곳, 만남과 이별이 스치는 정거장, 그 분주함으로 인해 거주는 불가능한 곳이다. 떠나거나 되돌아오는 사람들의 경유지다. 홍보미는 프로젝트를 위해 부산 김해공항을 생각했다고 한다. “주 텍스트를 단테의 ‘신곡’을 이용하여, 마치 천국 같기도 하고, 지옥 같기도 하고, 그리고 그 중간지대처럼 보이는 연옥 같기도 한 부산 김해공항”을 전향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홍티아트센터에서 본 것은 훨씬 더 상징적인 탈장소로서 부산비엔날레였다.
“부산비엔날레는 올해까지 11번 개최되었다. 다양한 주제가 소환되었다. 그리고 그에 걸맞은 세계의 작가들이 초대되었다. 하지만 2002년에서 2022년에 이르는 역대 비엔날레들의 주제들을 보라: ‘문화에서 문화로’(2002), ‘틈’(2004), ‘어디서나’(2006), ‘낭비’(2008), ‘진화 속의 삶’(2010), ‘배움의 정원’(2012), ‘세상 속에 거주하기’(2014), ‘혼혈하는 지구, 다중지성의 공론장’(2016), ‘비록 떨어져 있어도’(2018),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2020), ‘물결 위 우리’(2022).
겉도는 용어들, 동어반복, 홍보미는 말한다. “과연 저 말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주제 의식들이 어떤 식으로 펼쳐졌었는지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추상적으로 다가온다. (...) 아트 비엔날레는 무엇일까? 동시대에 여전히 스펙터클하게 진행되는 비엔날레가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휘발시키는지…” 그 안에서 고유성이 마모되고, 실체도 없이 부유하면서 모든 것이 ‘평평해지는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은 왜인가? 과도한 비용을 무릅쓰면서, 그토록 빠르고 반복적으로 미적 가치를 갱신해야 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생산 주의라는 폭력적 이데올로기의 현현인 현 자본주의 시스템의 필연적인 속성 때문이다. 이것이 오늘날 지침을 제공하고, 각성을 일으키고, 행동을 일깨우는 주류 예술론이다. 이브 미쇼의 묘사가 사뭇 적절하다.
“예술의 시대는 사건들의 시대가 되어야 한다. 뭔가가 끊임없이 일어나야 한다. 무엇이? 하지만 이 질문은 새로운 예술가, 새로운 전시, 개방된 표현, 새롭게 등장하는 참신한 주제 등이 생겨나는 한,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비엔날레는 전시 유형이나 방법론 이상이다. 그것은 생산 주의 이데올로기의 삼물이다. 그것은 예술을 2년마다 규칙적으로 갱신되는 신상품으로 만드는 인식 기계다.
2012년 부산비엔날레가 사례로 언급될만하다. (늘 그렇듯) 카셀 도큐멘타의 경험이 부산에서 동일하게 유효할 거라는 거친 가설과 셀럽 큐레이터의 마케팅 효과를 둘러싼 계산 아래 독일의 로저 M. 브뤼겔(Roger M. Buergel)이 예술감독으로 초빙되었다. 정부, 그리고 돈과 영향력 있는 세계의 기관이나 사람들이 관련된 문필검열에서 비엔날레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개최국(한국)이나 개최도시(부산)에 대한, 외국인-주로 서구의- 큐레이터들의 앎의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유럽과 동아시아의 역사와 문화의 차이를 (본의와 무관하게 부지불식간) 간과하거나 억압하는 정도는 능히 넘어서는가? 서세동점, 탈아입구의 콤플렉스, 후기식민지적 자장의 잔존에 대한 인식은? 서구중심주의적, 헤게모니적 사유에서 충분히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인가? 지역적 사유에 대한 입장은? 문화산업주의 범람에 대한 곧은 문제의식은 지니고 있는가?
2012년 부산비엔날레의 로저 M. 브뤼겔 감독은 기지를 발휘해 80여 명의 시민과 41명의 작가로 구성된 ‘배움위원회(Learning Council)’를 만들었다. 제트여객기를 타고 날짜 분계선을 넘어온 이방인 감독이 생면부지의 땅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다) 하지만 괴테의 말이 옳다. ‘아는 것이 시작(Knowledge is Beginning)이다!’ 부산비엔날레의 지평에 침습한 이런 식의 앎의 결핍은 제대로 된 시작을 시작하는 조건일 수 없다. 브뤼겔 감독은 부지불식간, 이 시작되지 않은 출발에 대해 고백한다. “… 우리의 정원은 아직 안개에 싸여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안개 너머에 대해 말해야 한다. 게다가 안개에 뒤덮인 배움의 정원에서 유희할 시간이 정말로 많이 남아 있지 않다. 페미니스트 미술가 마사 로슬러(Martha Rosler)의 말에 의하면, 우리가 잘 해나갈 수 있을지 정말로 의문이다. 마사에 의하면, 오늘날 특히 글로벌 비엔날레들의 주된 역할은 컬렉터들이나 대체적으로 그들과 긴밀하게 관련된 이론가들을 위해 봉사하는 데 있다.
홍보미는 부산비엔날레의 텅 빈 내면을 함축적으로 훑는 기능적 구조로서, 단지 경계만을 지닌, 불구적인 비장소를 만든다. 경계는 여러 개의 잇대어진 캔버스와 화판으로 세워지고, 그 내부의 벽을 따라 역대 부산비엔날레들의 포스터, 출품작 관련 이미지들, 그리고 홍보미 작가의 분방한 드로잉들이 이어진다. 관람자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동선을 따라, 덧없는 주제어들의 무기력한 도열, 그리고 충분히 기록될 겨를조차 없이 흘러가 버린 시간과 그 정화되지 않은 공허의 연대기와 마주한다.
그 글로벌 무대 위에 올려졌던 숱한 것들, 파편화되고 평평해져 버린 것들, 태도가 증발되어버린 것들의 끄트머리에서, 사유는 다시 홍보미의 드로잉으로, 미술관 만지기로 점프한다. 홍보미의 예술은 개념의 유희를 유희할 때가 아니라, 만지고 포용하고 관계 맺을 때 발생한다. 이는 홍보미가 부산의 홍티아트센터에 머물렀던 시간의 의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