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대구예술발전소(2023) 비평가 매칭 신보슬 큐레이터
프롤로그 가을이 무르익을 무렵, 슈트르가르트 슈타츠 갤러리(Staatsgalerie)에 들렀다. 전시 때문에 수차례 들렀던 슈트트가르트였지만, 늘 일에 쫓겨 정작 다른 미술관 전시를 둘러볼 여유가 없었는데, 이번에는 아예 작정을 하고 미술관을 찾았다. 게다가 독일 큐레이터와 함께 전시를 관람하게 되어 미술관의 역사, 컬렉션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으며 특별한 시간을 가졌다. 슈타츠갤러리는 제임스 스털링의 포스트모던 건축으로도 잘 알려져있지만, 자코메티, 몬드리안, 칸딘스키, 피카소, 에곤 쉴레, 프란시스 베이컨 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현대미술의 주요 작가들의 컬렉션으로도 유명한 곳이었다. 그 중에서도, 1984년 보이스가 직접 작품 설치를 진행했고, 그 후 보이스가 설치한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보이스의 방’은 슈타츠 갤러리의 자랑 중 하나였다. ‘보이스의 방’을 그대로 유지하는데 가장 어려운 점은 바로 작품이 부서진 곳에 흐트러진 부스러기와 먼지들이고, 먼지 한 톨 허투루 버리지 않기 위해 청소하시는 분들이 붓으로 세세히 그곳을 치운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문득 홍보미 작가가 생각났다. 미술이 무엇인지, 미술을 만져보기 위해 미술관 미화원이 되었던 작가. 그가 이곳에 보이스 작품의 먼지를 청소하고 있는 장면을 상상하게 되었다. 그가 여기 있었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1. 시작 홍보미와 미술과의 관계는 시작부터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만화를 좋아해서 미술 대학을 갔고, 미술 대학에서 만난 현대미술은 그녀와 잘 맞지 않았다. 대형 캔버스에 유화 작업은 그에게 버겁기만 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반대급부로 낙서 같은 만화적 드로잉을 그리게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일기 형식으로 그려갔던 자신의 드로잉이 미술계에서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미술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2. 국립현대미술관 미화원이 된 작가 물론 미술이 무엇인지 미술계란 어떤 곳인지에 대한 고민 한두 번 하지 않은 작가는 없을 것이다. 다만, 고민을 푸는 방식에 있어 작가마다 차이가 있다. 누군가는 책을 읽고, 글을 쓰거나 사색에 빠지기도 하고, 누군가는 선배 작가를 만나 조언을 구하며 답을 찾기도 한다. 홍보미는 자신의 삶에서 미술을 직접 체험하기로 하고 미술관 미화원이 되기로 한다. 하지만 작가라는 신분을 숨기고(?) 미화원이 되기도 쉽지는 않았다. 두 번의 낙방과 면접까지 거쳐 결국 국립현대미술관의 미화원이 되었다. 그렇게 가장 먼저 전시장에 들러 작품 곁에서 쓸고 닦고 하면서 작품을, 미술관을 만지는 그녀의 드로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3.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그리고 그 후 아이러니하게도 작가로서가 아닌 미화원으로서의 그녀의 이야기가 그를 미술계 현장 한가운데로 이끌어간다. 14개월 남짓 미화원으로서의 삶을 정리하고, 일지와 자료들을 바탕으로 만화책을 만들던 중에 국립현대미술관으로부터 출품 제안을 받은 것이다. 그렇게 국립현대미술관 50주년 기념 전시인 <광장:미술과 사회> 전시 제안을 받고, 미술관에서 일하면서 작품과 가장 가깝게 있지만, 미술과 가장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는 ‘미화 여사님들’의 일상을 담은 <Museum Drawing>(2019)을 출품했다. 그 높다는 국립현대미술관의 문턱을 단박에 뛰어넘게 된다. 작가로서의 삶이 아닌 미화원으로서의 삶이 또래 다른 작가들보다 먼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를 하는 행운(?)을 가져다준 것이다. 그 후 그는 박수근창작스튜디오, 홍티아트센터, 대구예술발전소 등을 거치며 미술계에서 안정적이게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해 오고 있다. <Museum Drawing>(2019)은 확실히 그녀가 작가로 흔들리지 않고 작업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던 작품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14개월이라는 미화원으로서의 삶이 제대로 소화되지 않은 채, 원래 계획했던 만화책을 기획하던 와중에 주어진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전시 기회가 과연 작가로서의 그에게 좋은 자극이기만 했을까에 대해 의심이 들었다. 그가 만일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에 참여하지 않았고, 계획대로 만화책을 완성하고 나름의 작가 활동을 이어갔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광장: 미술과 사회> 전시 이후의 작업에서 홍보미라는 작가의 엉뚱함이나 명랑함, 다시 말해 작가의 개성보다는 어디선가 볼 법할 만한 현대미술의 문법에 너무 익숙한 작품들이 연상되었기 때문이었다. 말로가 말했던 시공을 초월한 ‘벽 없는 미술관’과 뒤샹의 ‘여행 가방 속 상자’를 레퍼런스로 삼고 있는 <부산비엔날레 박스>(2022), 윌리엄 켄트리지를 언급하면 시작된 박수근 미술관에서의 <걷기·긋기>(2022) 등에서 보이는 홍보미의 작품은 스케일이 커지고, 드로잉에서 회화로, 회화에서 설치로 확장되었을지는 모르지만, 그 안에는 미술에 대한 제스츄어만 보였기에 공감하기 어려웠다.
#4. 세상과 마주함 홍보미는 목소리가 그지 크지도 않고, 자기주장이 쎄지도 않다. 하지만,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느껴지는 단단함이 있다. 그리고 작품을 대하는 태도를 곁에서 보면서, 그 단단함은 아마 그가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문제를 피하려 하지 않고, 그 안에 들어가서 직접 경험하고 문제를 마주 볼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을 막연하게 하게 되었다. 집에서 미술관까지 걸어가는 길을 촬영한 <미술관 가는 길>(2021, 2015), 국립현대미술관 개관전에 일어났던 화재 사건과 그녀가 사당동에서 미술관까지 걸어갔던 길을 다룬 <불타는 미술관>(2013), 서울에서 오산을 가는 과정을 담은 <문화공장 오산 가는 길>(2015)과 같은 작품은 세련되고 멋진 이미지가 아니어도, 거창한 메시지가 있지 않아도 작품 속에서 작가를 온전히 만나고, 작가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었다. 특히 쪽방촌 어르신의 이야기를 덤덤하고 발랄하게 그려낸 <쪽방의 흰머리 파티>(2019)는 지나친 감정 이입 없이 작품에 등장하는 영자 할머니의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또한, 영자 할머니의 모습에서 우리 사회 발전의 이면, 계층, 도시개발, 노인 문제 등등으로 다양한 레이어의 주제들을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가볍지만 진지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5. 마주함으로 그리는 드로잉 홍보미는 자신을 ‘드로잉 작가’라고 불렀다. 최근 들어 드로잉 자체가 독자적인 미술 형태가 되면서 그 범위가 확장되고 다양한 실험적 형식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작업을 드로잉으로 보는 것에는 아무런 무리가 없다. 다만 그의 드로잉의 특징은 무엇인가 하는 점에서는 좀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홍보미의 작품은 감탄을 불러올 만큼 테크닉적으로 뛰어나거나 감각적이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에 끌리는 이유는 그가 공허하고 개념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에 밀착된 이야기, 일상에서 직접 경험하고 만난 사람들에 대한 공감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집에서 미술관까지 걸어가면서 만난 환경,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젊은 작가로서 마주하는 거대한 미술계, 쪽방촌에서 만난 할머니, 미술관에서 만난 미화 여사님들에서 이야기를 펼쳐내기에 공감하고 귀 기울이게 된다.
#6. 아직, 못다 한 이야기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그가 다시 <Museum Drawing>을 마주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심 기뻤다. 그에게 <Museum Drawing>은 반드시 제대로 마주해서 정리하고 풀어가야 할 숙제, 아직 다 해소하지 못한 만남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Museum Drawing>은 그녀에게 언제고 한번은 되돌아가야 하는 지점이었다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미화원으로 살았던 작가 자신의 일상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미화원으로 그가 만난 또 다른 ‘미화원 여사님들’의 일상과 연대, 커뮤니티가 있었고, 그들을 통해 드러나는 미술관 시스템이 있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볼 수 없었던 미술관 무대 뒤의 장면과 이야기들이 있었다.
에필로그 얼마 전부터 홍보미는 미술관 이야기를 인스타툰으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미술관에 출근하여, 미술관에서 일했던 작가 미화원의 이야기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나는 그의 이 인스타툰이 미술관에서 미화원으로 일했던 시절의 완결이라도 보지 않는다. 그때의 ‘만남들’에는 아직 풀어낼 수 있는 많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계속 이 이야기만을 반복적으로 이야기할 것이라고도 생각지 않는다. 그에게는 또 다른 만남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하지만, 어떤 만남은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기도 한 법이니, 아직은 조금 더 미화원으로 만난 미술관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