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고충환. 미술평론가

작가는 집에서 미술관으로 가는 길을 그렸다. 가는 길에는 가로도 있었고 도로도 있었다. 가게도 있었고 신호등도 있었다. 갈 길이 바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유리창 너머로 가게 안을 기웃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때로 스치는 사람과 부닥칠 때도 있었고, 그때마다 매번 몸이 움츠러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혼잣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고, 눈에 띄는 손동작과 함께 저 홀로 소리 내어 웃는 사람도 있었다. 전화로 누군가와 통화를 했고, 걸려온 전화를 받기도 했다. 그날 날씨가 맑았는지, 아니면 흐렸는지, 그래서 기분이 살짝 우울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바람이 약간 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생각에 골똘했던 것도 같은데, 지금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것은 지도인가. 안내서인가. 작가가 그린 지도를 보고 사람들은 무사히 미술관에 도착할 수가 있는가. 성공적인 안내를 위한 안내서인가, 아니면 기꺼운 실패를 인정하고 방조하는 지도(?)인가. 미술관은 차치하고, 미술에 도대체 길이 있기나 한 것인가.

그리고 작가는 미술관에 청소부로 취직을 했다. 미술에 길이 있다면 그 길이 무엇인지 알아야 했고, 길을 알기 위해선 미술이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미술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선 미술과 가장 가까이서 가장 많은 시간 호흡을 같이할 필요가 있었고, 그 필요에 부합하는 직종이 미술관 청소부였다. 그러므로 적어도 논리적(양적)으로만 보자면 미술관 청소부가 미술에 대해 가장 잘 알 것이었고, 가장 많이 알 것이었다. 그런데, 실제로도 그런가. 흔히 미술은 알아야 보이고, 아는 만큼(만) 보인다고 했는데, 그 앎은 미술과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한 만큼, 그래서 미술에 대해 누구보다도 많은 것을 알고 있을 미술관 청소부의 앎과도 일치하는가. 아니면, 다른가. 다르다면, 어떻게, 왜 다른가. 미술에 대한 앎은 그 다름을 수용해야 하는가. 그래서, 그 다름으로 미술은 재정의되어야 하는가. 그렇게 미술관 가는 길로 시작된 작가의 작업은 미술에 길이 있는지의 문제로 확대되고, 재차 미술은 어떻게 정의되는지 하는 정의의 문제로 재생산된다.

그렇게 미술의 길에 대한 문제는 미술의 정의에 대한 문제로 종착 되었다. 그 지점에서 작가가 주목한 것이 미술사이고 패러디였다. 미술사에는 미술을 향한 무수한 길들이 나 있었고, 그 길들을 따라가다 보면 마침내 미술에 대한 정의 문제도 덩달아 환해질 것이었다. 그렇게 작가가 이런저런 미술사를 참조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마르셀 뒤샹과 렘브란트가 눈에 들어왔다. 렘브란트의 <야경꾼>을 참조해 그렸는데, 아마도 밤을 지키는 파수꾼, 이성을 상징하는 미네르바의 올빼미로 나타난 상징적 의미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길이 없는 곳에서 길을 찾는, 길을 여는 실천 논리를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마르셀 뒤샹의 <샘>은 알다시피 남성용 변기를 미술관에 전시한 것이다. 쉽게 말해 같은 오브제라도 화장실에 있으면 변기고, 미술관에 있으면 작품이 된다는 논리다. 하나의 오브제가 작품이 되는 것은 오브제 자체의 고유한 성질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것이 예술계라는 제도적 맥락 속에 들어오는 것과 관련된다. 결국 예술작품을 결정하는 것은 맥락이다. 그러므로 맥락이 달라지면 의미 또한 달라진다. 그렇게 예술의 정의 문제는 맥락의 문제로 옮겨진다.

그리고 작가가 주목한 것이 흐르는 드로잉이고, 첩첩한 드로잉이다. 전시 공간으로 선택한 투명한 유리 벽면 위에 전시 기간 내내 드로잉을 하고 지우기를, 그리고 덧그리기를 반복 수행해 보여주는 작업이다. 원래 밑그림을 의미하는 드로잉은 그 의미가 발상, 착상이라는 의미의 뿌리 말 디세뇨(disegno)와 통하고, 앙드레 말로의 상상의 미술관과도 통한다. 미처 물화 되기 이전의 착상 자체가 이미 예술이고 실천이라는 논리다. 그렇게 작가는 그림을 그리고 덧그리기를, 개념을 쓰고 고쳐쓰기를 반복해 보여준다. 옛날 종이가 없던 시절 양피지 위에 텍스트를 쓰고 지우기를 반복한 나머지 마침내 너덜너덜해진 양피지 이론(롤랑 바르트)을 떠올리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 예술에 대한 정의는 아마도 그렇게 지워진 텍스트들, 중첩된 텍스트들 속 어딘가에 떠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작가는 맥락 갈아타기 놀이를 수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작가는 지금, 잭 케루악과 윌리엄 켄트리지와 같은, 길 위의 예술가들처럼 미술(예술)의 길을 찾아 헤매는 중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미 미술이라는 길 위에, 속에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