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보미 개인전 《BUSAN BIENNALE BOX》 (홍티아트센터, 2022.10.5.~10.15.)

김선영(공간 힘 큐레이터)

2022

한가운데의 박스

부산비엔날레가 개최되는 가운데 홍보미는 ‘부산비엔날레 박스’를 열었다. 첫 번째 전시장에서 ‘박스’는 하나의 커다란 공간으로 존재한다. 30호짜리 3개의 캔버스를 세로의 가벽으로 세우고, 가벽 여러 개를 삼면으로 두른 전시 부스의 형태이다. 박스의 외관은 캔버스 뒷면으로만 구성되어 내부를 철저히 숨기고 있다. 그물망과 벨트, 밧줄, 현수막, 덧씌운 천의 일부만 발견된다. 캔버스의 뒷면, 박스의 가장자리를 따라 돌아서 입구에 도착한다. 박스는 각종 오브제와 이미지가 뒤섞여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역대 부산비엔날레의 포스터와 도록 이미지, 텍스트, 관련한 기사 그리고 택배 상자와 각목 자투리, 모래, 인형 등의 무더기가 여기저기에 흐트러져 있다. 박스가 무엇인지는 그 외관도, 속을 들여다보아도 도통 한숨에 알아차리긴 어렵다.

벽면에는 캔버스 틀에 따라 칸이 질러져 있고, 한 칸당 하나의 캔버스, 개별의 작업이 있다. 개별 작업은 다양한 오브제를 콜라주 하면서, 동시에 유명 현대미술 작품과 부산비엔날레에 출품된 작품을 패러디하고 있다. 가령, 부산을 대표하는 야구구단인 롯데자이언츠의 캐릭터, 지역의 신문 기사 혹은 부산비엔날레에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부산 항구 어딘가에서 주워온 그물망과 부표 등을 재료로 쓰면서도 한편에는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 몬드리안의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사탕 등의 패러디가 구석구석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구성은 칸과 칸이 어떠한 의미의 연결을 가진다기보다 각각의 정보 누적으로부터 공통의 맥락을 발견하도록 한다. 개별의 칸은 부산비엔날레/부산/미술의 키워드를 개별적으로 패러디하는데, 세 개의 키워드가 겹치는 칸도 있지만 여전히 칸 간의 연결은 요원하고, 개별 이미지가 연상시키는 것을 통해 이 박스가 품고 있는 내용을 유추할 뿐이다. 홍보미는 부산/비엔날레/미술을 연상시키는 66개(설치까지 포함하면 더 많은 수)의 이미지를 생산하고 거대한 박스에 저장했다. 과연 박스에 담긴 이미지는 어떤 기준으로 콜라주 되고, 패러디되고, 결국 박스에 담겨졌을까. 두 번째 전시장에는 그 박스에서 따로 건져냈을 장면이 있다.

입구에는 소 내장 말리는 과정을 기록한 짧은 영상이 루핑 되고, 정면의 높은 벽면에는 검은 풍선으로 글씨를 대신한 문장이 설치되어 있다. “혼혈하는, 없이, 배움의 정원, 삶을, 문화, 실현하기….” 글씨를 간신히 읽어 내려가지만, 풍선은 공기가 빠져 쪼그라들었고, 다음 단어를 찾고, 찾으면서 이내 문장의 맥락을 잃어버리고 만다. 결국, 첫 번째와 두 번째 전시장을 거쳐 우리가 본 것은, 보아야 할 것은 무엇이었을까. 텅 빈 곳과 미술 작품으로 가득 채워진 곳들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았을까. 분명 ‘무엇’들을 열심히 보았지만, 그것이 무엇이라는 확신은 들지 않았다.

여정의 시작

드로잉을 작업의 주된 매체로 삼아온 홍보미는 2015년 개인전 《미술관 가는 길》에서 제목이 의미하는 그대로, 집(서울)에서 경기도 오산까지 이동하며 마주한 풍경을 그렸다. 가로수를 옆에 두고 보도블럭 위를 걷다가 또 다른 인도를 걷고, 횡단보도를 건너 사람들과 버스를 기다리는 등. 이동하며 마주한 장면을 나열했다. 보고 본 것을 계속해서 그리기, 그리고 그려진 것을 계속해서 보기, 그의 ‘미술관으로 가는 길’은 실상 일상과 특별하게 다르지 않았다. ‘미술은 무엇인가’를 질문으로 품고 작업했다던 그에게 ‘미술관 가는 길’은 이미 미술제도 외에서 미술인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자 기록이며, 홍보미의 드로잉에 얽혀있는 방법론이다. 따라서 이 질문은 지금까지 홍보미의 작업에 주요한 주제가 되고 있다.

비슷한 방식으로 이번 전시의 실마리로 볼 수 있는 <비엔날레 섬>(2015)이 있다. 파란 배경 위에 수많은 작품이 조그맣게 선으로 묘사되고 서로 겹치는데, 그 밀도가 뭉쳐 하나의 커다란 섬을 이룬다. <비엔날레 섬>은 작가가 베니스비엔날레를 경험하고 난 뒤, 그곳에서 보았던 것들을 도록을 참고하며 그려 넣은 것이다. 당시 그는 처음 가본 베니스비엔날레를 오래 체류하며 미술이 무엇인지에 대한 감각을 넓혀 주었다고 할 만큼 정말 열심히 보았다고 했다. 그러나 이후 그에게 남은 것은 손에 잡히지 않는 ‘무엇’이었다. 당시의 감각과 기억은 어렴풋하게만 남았고, 지금의 내게까지 말을 걸어오는 기억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겨우 더듬어야 하는 기억들. 그래서 홍보미는 도록이라는 공식적인 자료로, 매끈하게만 남은 이미지를 앞에 두고서 내가 본 것,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기억했으면 하는 것, 기억해야 하는 것들을 생각하며 캔버스 앞에서 시간을 보냈다. 자신이 기억하는 것과 다른 매끈한 풍경, 작가는 이러한 지점에서 드로잉을 시작한다. 자신의 몸 감각과 기억 그리고 관련한 정보 그사이를 오가며 가 닿고자 하는 세계를 가늠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가 그려낸 세계는 어쩌면 우리를 향하지 않는다. 작가 자신의 주관적인 감각과 객관화된 세계 사이의 팽팽한 겨루기 속에서 자신이 본 것을 ‘확인’하려는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따라서 홍보미에게 드로잉은 몸 감각의 기록이자, 그 감각은 무엇이었는지를 돌아보는 수행의 과정 전반을 포함하고 있다.

이번 전시를 제외한 최근의 개인전인 《걷기·긋기》(박수근미술관, 양구, 2022)에서는 위와 조금 다른 방식의 드로잉을 볼 수 있다. 강원도 양구에서 1년간 레지던시에 참여하며 개최한 전시이다. 그는 양구에 있는 동안 종일 곳곳을 걷고, 지나며 체험한 것을 주제로 약 90여점을 드로잉 했다. 가령, <파로호 긋기_10>(2021-2022)는 양구의 지리적 특성으로부터 북한의 존재를 더욱 가깝게, ‘코앞’에 있다고 느낀 몸 감각에서 출발한 드로잉이다. 가까운 곳을 더욱 알기 위한 방법, 간접적인 방식으로 다가가기 위해 그는 북한을 경험한 사람들의 글을 찾아 읽거나 그곳의 상징적인 이미지를 검색해 그려 넣었다. 기존의 원근을 제하고 말이다. 홍보미에게 이번 드로잉은 절대 감각할 수 없는 세계를 상상하는 방식이었다. 또한 이미지의 실체 없음을 또다시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그동안 홍보미는 현실 세계를 시간으로 분절하여 한 화면에 나열하여 기록하거나 자신이 느낀 특수한 감각과 기억을 꺼내 보며 현실 세계의 감각과 어떻게 일치되고 유리되는지를 확인했다. 그 과정에서 이미지가 현실과 정반대의 상황을 유도하거나 반대로 진실 그 자체이기도 한 양면을 가진다는 것 또한 확인하게 된 것이다.

<부산비엔날레 박스>의 실마리를 <비엔날레 섬>으로 둔다면, 2015년부터 2022년까지 이어진 홍보미의 여정에는 본 것에 대한 의심, 확인이 지난하게 펼쳐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박스’와 ‘섬’은 ‘비엔날레’라는 소재, 그리고 비엔날레를 채우는 개별 작업을 공식적인 이미지(도록)로부터 활용해 작업한 것은 이번 전시와도 유사하게 보인다. 또한 한 화면/박스 가득 미술적인 형태들이 자리하고 있지만 결국 볼 수 없게 된다. 너무나 많기 때문에 모든 것을 볼 수 없어 들여다볼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일까. 혹은 많은 이미지로 가려진 현실의 부재 때문일까. 어쩌면 작가는 작업을 통해 확신이 없는 확인만을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스꽝스럽거나 진지하진 않게, 또 좋음과 나쁨의 입장을 조금씩 유보하면서 우리를 계속해서 열린 결말로 내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난한 여정에서 남겨진 것

그럼에도 홍보미의 드로잉은 분명히 ‘무엇’을 남긴다. 남겨야만 한다. ‘남기는 것’을 기준으로 둔다면, <Museum Drawing>(2019)은 홍보미의 작업 세계에서 하나의 변곡점이다. 홍보미는 미술관을 가장 가까이서 감각해보기 위해, 말 그대로 물리적으로 가장 가까이에 있는 미술관의 청소미화원으로 근무하게 된다. 약 1년 2개월간 미술관을 쓸고 닦으며 매일 일지를 쓰고, 사진을 찍는다. 물론, 이후에는 미술관에서 사진과 영상을 함께 전시하기도 했지만, 홍보미의 작업 중 가장 긴 시간 드로잉을 진행했다고 할 수 있다. 약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는 관객과 작가였다면 닿을 수 없었을 곳까지 미술(관) 구석구석을 쓸고 다녔다.

<Museum Drawing>의 동기 또한 앞선 작업의 방법과 같이 미술의 존재를 만지기(감각하기) 위한 것이었다. 감히 말하지만, 그의 작업적 관심에는 오로지 미술 그 자체만 있었다. 그러나 작가이자 미술관 청소부가 된, 이제는 이중의 스파이가 된 그에게는 그 질문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 질문은 청소부에게 중요하지 않다. 작업복 조끼를 입으면 미술관에 있어도 ‘투명 인간’이 된 듯 아무도 그의 존재를 인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가 온몸으로 느낀, 미술관에서 누락되는 감각이야말로 ‘미술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 작동할 터였다. 게다가 작가는 그 작업이 남긴 것에 대해 처음으로 “사람”이라는 구체적인 답변을 내놓았었다. 이번 <부산비엔날레 박스> 속에 부산비엔날레의 전시장 로비에서 녹음했다던 사람들이 움직이는 사운드 오브제와 겹쳐지는 대답이다.

그래서 다시 부산비엔날레 박스 앞에 선다. 10회가 넘는 비엔날레의 낱낱을 들여다보고, 그 중 몇몇 작업을 선별해 패러디, 재구성하는 것만큼 지난한 작업이 있을까.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한 것은 ‘부산비엔날레’ 혹은 ‘부산비엔날레 박스’가 아니다. 주요한 것은 부산비엔날레가 가지는 특수성이 아닌 ‘브릴로 박스’, ‘여행 가방 속 상자’처럼 미술에 대한 질문이자 계속해서 질문 그 자체로 남기기 위한 시도이다. 그동안의 작업에서 나열한 이미지의 양적인 특징이 두드러졌던 것은 이미지의 스펙터클 속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 고민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재고하도록 했다. 하염없이 걷거나, 대상을 만져보는, 말 그대로인 몸으로 부딪치는 방식으로 수행하면서 말이다. 작가는 미술의 존재론이자 역할에 대한 질문을 그 주변의 물리적 거리, 시간, 정서적 관계 등 실제 삶과 같이 이미 자신을 둘러싼 주변에서 찾고 있다. 그러니 이제는 그가 찾고자 하는 질문, 확인하고자 하는 세계를 확신하고 작가가 이미 더듬은바 있는 구체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단계는 아닐까. 또한, 만약 작가가 이미 어딘가에 도착해있다면, 여정을 곱씹는 것은 이제 충분하다. 여정을 일일이 열거하고 가득 채우지 않아도, 일정한 시간을 지표로 분류하고 기록하지 않아도 작가의 경험 안에는 수많은 세계의 균열점과 그곳에서 발생한 질문이 가득하기 때문이다.